Portfolio

The BC 프랑스 여행 기사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여행기사

The BC

2014년 5월

writing_1 writing_2 writing_3 writing_4


프로방스. 언제나 봄

그곳은 늘 봄이었다. 3월엔 당연하단 듯 봄이었고 7월엔 여전하단 듯 봄이었고 11월엔 그것도 몰랐냐는 듯 봄이었다. 프로방스의 봄 풍경은 봄이란 단어가 무색할 만큼 일상적이었다. 일상적인 설렘과 일상적인 밝음이, 라벤더 향 가득한 들판을 가로질러 마르세유 앞바다까지 꽃밭처럼 펼쳐져 있었다.

Avignon, France

언어학자 소쉬르가 과학적인 언어학 이론을 정립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말글로 표현한 단어가 실제 사물의 고유한 특징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봄을 봄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봄이라는 낱말이 봄이라는 계절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그런 믿음은 더 이상 과학적인 분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들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일 뿐이란 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땅의 필연적인 그 이름, 봄

우리의 감정은 늘 논리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학자들이 아무리 ‘그게 아니에요’하고 얘기해 줘도 통하지 않는, 특정 단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 말하자면 ‘프로방스’란 단어에 꽃과 봄이 운명적으로 들어 있다는 믿음 같은 것. 그 단어를 발음하면 혀에서 꽃말이 돋고 뺨에서 봄내음이 솟아나리라는 믿음 같은 것. 그래서 나는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부터 론(Rhône) 강을 따라 멀리 알프스 산자락까지 커버하는 이 너른 지역을 프로방스라 묶어 부르며 일 년 내내 동경했다.

프로방스란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이는 별로 없겠지만, 실제로 프로방스가 어디인지를 콕 집어 말하기는 좀 애매하다. 역사적으로 프로방스라 불려 온 지역은 현재 프로방스-알프스-코타쥐르(Provence-Alpes-Cote d’Azur)라 부르는 것이 정확하며, 이 드넓은 지역은 마르세유(Marseille)와 칸느(Cannes), 니스(Nice) 같은 남동부 주요 항구에서부터 남서부 알프스까지 포함한다. 물론 “봄의 상징”으로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런 봄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장소만을 꼽는다면, 여기에 속한 6개 지역 중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마르세유 같은 도시가 있는 부쉬뒤론(Bouches-du-Rhône) 지역과 아비뇽(Avignon)이 있는 보클뤼즈(Vaucluse) 정도다. 내가 찾고 싶었던 봄의 향기도 바로 이곳에 있었다.

바람의 향기, 엑상프로방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야말로,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프로방스란 지역에서 가장 프로방스다운 곳이다. 은빛 햇살과 찬연한 꽃이 늘 만발한 곳답게 이곳은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이 평생을 산 고장이기도 하다. 세잔은 1839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다닌 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갔지만, 그 이후에도 평생을 파리와 엑상프로방스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한 뒤 낙향하여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살아생전 세잔이 쓰던 아틀리에(Atelier Paul Cézanne)와 2층에 큰 창이 난 아름다운 스튜디오(Jas de Bouffan), 그림을 그리기 위해 즐겨 찾던 비베뮈스 채석장(Bibémus Quarries)은 여전히 세잔을 추억하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엑상프로방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도로 위에 박힌 금빛 배지를 볼 수 있는데, 세잔에 집중하여 이곳을 둘러보려면 이 반짝이는 배지만 따라 다니면 된다.

Aix-en-Provence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동향 친구인 에밀 졸라와 “절친”이 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라보 거리(Cours Mirabeau)의 노천 카페에서 즐겨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손님들의 수다로 활기찬 레스토랑인 레되갸흐송(Les Deux Garçons)에 앉아 이 거리를 바라보면, 젊은 작가와 화가를 매혹한 그 봄의 실체가 느껴진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앉아 있으면 느껴지는 장면 장면들을 글로,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어진다. 거기서 가로수 그늘 사이를 잽싸게 유영하는 바람이 미지근한 온천수가 끊임없이 솟는 분수 위에서 하얀 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가 머릿속에서 명멸했고 그것들을 쉴 새 없이 받아 적었다. 커피가 그 사이 살짝 식었다.

Aix-en-Provence

플라스데프레쇠르(Place des Précheurs)와 플라스드베르됭(Place de Verdun)은 엑상프로방스의 대표적인 두 광장이다. 이곳에선 화, 목, 토 오전마다 노천 시장과 벼룩시장이 각각 열린다. 따뜻하게 머리를 감싸 안는 햇살 아래서 여유로운 웃음을 띤 사람들이 팔 것들을 펼쳐놓은 야외 시장의 광경은 유럽 어디서나 어렵잖게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엑상프로방스를 방문한 이라면 더더욱 놓칠 수 없는 장소가 여기다. 광장 한 구석에는 어김없이 분수대가 있고 거기선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온수가 퐁퐁 솟는다. 물 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돌로 만든 분수대에 앉으면 한국의 찜질방에 온 듯 엉덩이가 따뜻해진다. 손에는 계란과 사이다 대신 향기로운 치즈와 야들야들한 햄을 얹은 브루스게타와 짭조름하게 절인 올리브 한 컵을 들었다. 식사를 위해 그늘을 찾아 들어가기엔 햇살이 너무 아까워서인지 주변엔 이렇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텔드비유(Hotel de Ville, 시청) 앞 꽃시장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향기마저 탄산수 같은 청량함을 준다. 풍경에 감탄하고 햇살에 감사하며 꽃과 음식과 이 모든 여유에 감동하는 방법을, 나는 프로방스에서의 첫 네 시간 만에 모두 알아버렸다.

시간의 색채, 아비뇽

남부 프랑스의 젖줄인 론 강이 크게 한 번 땅을 휘감아, 알프스 자락에서 서쪽으로 달려 온 뒤헝스(Durance) 강과 만나는 곳에 아비뇽이 있다. 이 고색창연한 도시는 프로방스의 서쪽 경계이자 보클뤼즈와 부쉬뒤론 지역의 경계이기도 하며, 엑상프로방스에서 불어온 라벤더 향기가 비로소 론 강물에 보랏빛 숨결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종착역이다.

Avignon, France

엑상프로방스에서 내내 온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봄기운은 아비뇽 역에 내리는 순간 우아한 회상으로 바뀐다. 열 번의 세기가 바뀌도록 론 강 위를 지킨 아비뇽 다리(퐁생베네제, Pont St Bénezet) 위를 거쳐갔을 수없이 많은 봄기운엔 우아한 여유가 있다. 12세기에 처음 세워졌고 강이 범람할 때마다 무너지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던 이 다리는 지금 끊어진 채이지만, 프랑스인 모두가 아는 민요(Sur le pont d’Avignon) 속에서 이미 영생을 얻은 뒤다. 언덕 위에는 이 다리와 함께 아비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교황궁(Le Palais de Papes)이 강을 굽어보고 서 있다. 아비뇽 역과 시내를 곧장 잇는 중심가인 헤퓨블리크 가(Rue de la République) 끝에서 교황궁의 거대한 돌벽을 지나 언덕 위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차츰 이 도시의 골목들과 그 골목을 관절처럼 잇는 광장들과 그 너머 반짝이는 강물들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잔잔한 강물 위에 봄은 벌써 내려와 있었다. 온기가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선 갈색 지붕을 타고 흘러 중세의 골목을 편안하게 채웠다. 광장의 노천 카페에서, 어깨 너비의 출입문을 마주하고 선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에서, 눈 감으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돌다리의 바람 소리에서, 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아비뇽의 시간에도 꼼곰하게 붓질을 하고 있었다.

꽃다운 블루, 마르세유

아비뇽 역에서 기차에 올라 보랏빛 라벤더의 파도를 가로질러 다시 남쪽으로 잠깐 달리면 2천 년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닿는다. 프로방스의 이 남쪽 끝자락 도시는 향긋한 보랏빛 대신 선명한 마린 스트라이프가 사시사철 떠오르는 항구다.

Marseilles, France

짙푸른 항구의 사람들은 라벤더 밭 사람들만큼 나긋나긋하진 않다. 목소리와 동작이 크고 낯선 이의 질문에 꽤나 퉁명스럽다. 좁은 항구 사이로 배는 쉴 새 없이 드나들어야 하고 배에 가득 싣고 온 생선과 잔잔한 파도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곳에서의 당연한 풍경이자 항구만의 매력이다. 더군다나 동남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오래된 포구의 이런 떠들썩한 봄 풍경이라면, 이 모든 소란과 부산스러움도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란 없다.

Marseilles, France

마르세유의 비유포흐(구항구, Vieux Port)는 머릿속에 그려보는 그런 봄날의 바닷가 풍경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눈앞에 재현해 놓은 세트장 같은 곳이다. 이 바다의 색채는 꽃보다 아름다운 파랑이다. 어부들이 걸친 색의 앞치마는 누가 일부러 코디라도 해 준 듯 선명하고, 그 앞에 펼쳐진 싱싱한 고기들은 입꼬리가 주욱 올라가 마치 하하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비릿한 바다 향기가 계속 내 뒤를 밟는 것도 아니다. 항구를 등지고 선 언덕 위 골목 골목에는 무지갯빛 비누나 수제 초콜릿이 걸려있고, 다시 프로방스의 익숙한 향기로 가득하다. 마르세유는 오래 전부터 프로방스 지방 곳곳에서 모인 꽃과 나무들이 비누와 향수와 오일로 옷을 갈아입고 배에 실리는 곳이었다. 비유포흐 맞은편 언덕에 있는, 항구만큼이나 오래된 구시가인 르파니에 지구(Le quartier du Panier)가 그런 마르세유의 특산물을 팔고 있는 곳이다. 눈앞엔 푸른 바다와 피쉬 마켓이 펼쳐지고 등 뒤에선 쉴 새 없이 꽃바람이 불어오는 곳. 거기서 나는 프로방스의 바다 관문이 되는 곳이라면 응당 이래야 하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계속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봄바다를 내려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