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Life

[위플래쉬] 예술을 위한 진상 짓의 한계란

J.K.시몬스 데미언 샤젤

이번 달 유네스코 뉴스 마감을 끝내고 홀가분한 맘으로 극장에 들러 위플래쉬를 봤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상영관 안엔 저 뿐이더군요. 지상 최대의 DVD방을 빌린 기분으로, 혹은 슈퍼사이즈 홈시어터를 갖춘 갑부(?)의 맘으로 편하게 기분좋게 영화를 봤습니다.

교육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 혹은 자신들의 포지션 상 그럴 수밖에 없는 – 클라이언트들과 많은 일을 해서인지, 영화를 보면서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더 나아가 ‘예술’은 그럼 어떻게 태어냐는 게 옳은지도요.

위플래쉬는 단순히 보면 우리 세대가 선생님과 부모님들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텍스트를 통해 무한 반복으로 들어왔던 바로 그 ‘고진감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꾹 참고 공부를 하렴”, “다 널 위해 때리는 거야”와 같은, 적어도 우리 세대에겐 꽤나 익숙한 경험으로 기억되는 상황이 영화 속에 펼쳐집니다. 선생님은 폭력과 모욕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학생을 몰아붙이고, 학생은 결국 ‘내 인생 가장 찬란한 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요. 그 절정의 순간, 엉덩이가 들썩이고 기립 박수를 쏟아내고 싶은 그 순간의 영화적 묘사는 위플래쉬가 왜 지난해 최고의 영화였는지를 입증하는 명장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위플래쉬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이룬 영화적 성취와는 별개로 느껴졌던 어떤 불편한 마음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위대한 예술, 혹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제단에 갖다 바쳐야 할 ‘온갖 어려움’의 목록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먼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당장 어느 선까지 비루해져도 괜찮은 걸까요? 예술의 정점에 닿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괴팍해져도 괜찮은 것이며, 그 괴팍함을 상대에게 강요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큰 꿈을 위해 다른 행복, 혹은 다른 도리를 일부라도 포기하는 게 과연 옳기는 한 일일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예스’인가 ‘노’ 인가, 혹은 ‘메이비?’인가에 따라 영화가 주는 불편함의 정도가 달라질 것 같아요. 그 대답을 결정하는 데 개입될 가치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 함정이긴 합니다. 말하자면 주인공 앤드류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겪은 몇몇 일들이 과연 우연이었느지 미필적 고의였는지부터 시작해, 결국엔 ‘서정주 시인의 문학적 성취와 그의 친일 행적을 얼마나 분리할 수 있겠냐’는 문제까지 가 닿을 테니까요. 물론, 다시 말하지만 그 불편함이란 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입니다. 이 영화, 이 배우들, 그리고 그 음악은, 정말로 압도적이거든요.

저는 어쨌든 위플래쉬를 위대함이나 성공이란 단어에 필연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독선과 자기파괴의 단면을 비추는 영화로 봤습니다. 아니,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다. 영화 속 앤드류의 비아냥과는 달리 “시시하게 90살까지 살다 가는 것”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30대에 자살하는 것보다” 꼭 못하다고 생각진 않을 만큼 세상을 살아버려서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데미언 샤젤 감독 역시 크게 다르게 생각진 않을 거라 믿어요. 개인적으론 감독이 영화의 마침표를 찍은 시점을 그렇게 잡은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J.K.시몬즈(이런 말 진부하지만, 정말 그 말고 다른 배우가 맡은 플레처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의 정말로 오줌 지릴 정도로 어마무시한 카리스마는 오래도록 잊기 힘들 것 같아요. 앤드류 역의 마일즈 텔러가 보여준, 드럼 스틱 사이로 흔들리듯 내쏘는 ‘약물 빤’ 눈빛도 잊을 수 없고요. 더불어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인 음악을 스토리 그 자체에 자유자재로 녹여 낸 엄청난 연출도 그 자체로 무결점이라 할 만했습니다. 음악 사운드 때문에라도, 위플래쉬는 극장에서 내려지기 전에 서둘러 가서 사수해야 할 영화입니다.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