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Life

채념될 사랑도 얼마나 행복한가

이터널선샤인

“10주년 기념 재개봉”이라는 어마무시한 세월의 무게를 머리 위에 이고 <이터널 선샤인>을 극장에서 다시 만났다. 10년 전 그 때 “아는 사람들만 호응해 준” 이 흥행 실패작을 열렬히 지지한 한 명이란 자부심(?)을 내세우기 무색하리만치, 이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 내 안에 온전히 남아있진 않았다.
영화를 보고 블로그에 꽤나 길게 글을 썼던 기억은 난다. 물론 그 블로그와 글은 사라지고 없지만 내용이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사랑과 세월과 망각에 대한 20대의 “감성돋는” 이라 쓰고 장황하고 불필요하게 너저분한 글조각이었을 테니.

10년이 흐른 지금 다시 보는 영화는 많이 다를거라 생각했다. 스무 살 때 본 <러브레터>와 서른 넘어 본 <러브레터>가 온전히 같은 영화일 수 없듯, “영원한 햇빛” 따위의 수사를 눈 하나 깜빡 않고 약속하던 그 때의 내가 불혹(?!) 목전에 둔 내 안에 오롯이 남아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내게,

“그럼 어때?”

다시 지겨워지고 느슨해지고 권태로워질, 그 똑같은 사랑의 반복 재생을 앞두고 조엘이 던진 마지막 대사가 가슴에 와 박혔다. 정말 그랬다.

너와 함께하지 못할 수백 가지의 이유, 너만 아니었다면 하는 수백 가지의 핑계, 너와 나의 첫 다짐을 기만할 수백 가지의 잔인한 현실을 내가 지금 몇 초만에 떠올릴 수 있다 한들,

그럼 어때?

라는 한 마디를 온전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을 사랑하지 못할 수많은 논리적 이유들은, 부도수표인줄 알면서도 입에 달고 또 달았던 그 시절의 “사랑해” 한 마디를 전복하지 못한다. 영화 마치고 라이브톡을 진행했던 이동진의 말마따나, “무차별적인 권태의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결국 남는 것은 사랑했던 이유가 아니라 사랑했던 시간들” 이기 때문에.

덧,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포프의 시 제목이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파리 다녀와서 이 연인들 얘기도 뭔가 장황하게 썼던 것 같다 ㅠㅠ 이래서 블로그는 홧김에 삭제하거나 그럼 안(…)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페르라셰즈에서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처녀의 제비뽑기와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가는 세상과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흠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의 빛과..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은 얼마나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