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Life

무엇이든 “단 하나의 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캐롤]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캐롤]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금 세 가지의 시간과 장소가 있다.

우선 영화의 배경이 된 1950년대 초반 미국 뉴욕이라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그리고 만개했던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시대, 하위문화로서 동성애 창작물의 에너지가 넘쳤던 시대 이후 동성애라는 사랑의 방식과 성적 정체성의 방식과 존재가 ‘좀 더’ 일상화되고, 동시에 덜 전투적인 무엇이 된 시대와 장소에 서 있는 영화감독의 시간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 동성애라는 것이 격렬한 사회적 금기의 대상인 동시에 사회적 담론투쟁에 겨우 진입하는 한국이라는 시간과 장소 속 관객의 시간이 있다.

자신의 시간과 공간의 이슈 속에서 절박하게 세계-작품을 보는 것은 뜨거운 일이다. “크게 감동”받고 “내 삶을 돌이켜보는” 작품의 경험을 우리는 강조한다. 그러나 관객이 자리 잡고 있는 시공간의 컨텍스트와 (뜨거운) 시대의 창이 모든 시간 (영화의 시간, 감독의 시간)을 다 휩쓸어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

휩쓸지 않고 이 각각의 다른 시대들이 ‘착오’를 빚으며 조우하고 긍정적 오독을 낳는다면 새로운 감정과 감각이 피어날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부디 좀 더 풍요로운 영혼을.

슬로우뉴스 이나라 필자의 글이다. (워낙에 습관적으로 써 오던) ’하필’이란 말을 “하필” 그 타이밍에 붙였던 평론가와, 거기에 깜짝 놀랄 정도로 ’버럭’하던 몇몇 관객과 그로인해 벌어진 모든 난리법석(?) 속에 가장 빛난 – 혹자에게는 여전히 무난하기만 한(?) – 글이라 생각한다. (스트레이트 남성이라 어쩔 수 없단 비난을 들을지라도) 여전히 “왜 저렇게까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로선 그러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단 사실 자체가 새로운 배움이자 미처 모르지만 명확히 존재하고 있었던, 그래서 무심코 상처줄 수도 있을 어떤 시각과의 첫 만남이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을 것이고, 그렇게 모두들 한 발짝은, 혹은 반 발짝 만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