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스틸컷
On Life

써지지 않았던 것까지 찬란했던 영화 남한산성

Image Credit ⓒ CJ Entertainment

경험상 글로 된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는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았다. 그러니 연필 자국이 뒷장까지 꾹꾹 묻어나올 것만 같은 김훈의 글이 은빛 스크린 위에서도 그대로 육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 유명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이”가 “을”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을”이 “이”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를 두고 몇 시간씩 이야기했던 이라면 영화 남한산성 을 기다리는 심정 혹은 우려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웬걸.

단어와 단어, 쉼표와 줄바꿈 사이의 공백이 읽는 이의 마음을 얼마나 모질게 후벼팔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의 글이, 대사와 대사 사이의 찰나에 던지는 시선이 보는 이의 오감을 얼마나 철저히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배우를 만난 결과는 경이로웠다. 남한산성 의 성패가 애초부터 김훈의 문장을 어떤 배우가 어떤 식으로 담아내느냐에 달린 것이었다면, 이병헌과 김윤식과 박해일의 연기는 성공이냐 실패냐를 따지는 수준 이상의 성취다. 태산보다 무거웠을 김훈의 문장은 쏟아지는 말과 글이 아니라 그사이를 빈틈없이 메운 배우들의 눈빛과 몸짓에 실려 가슴 가장 깊은 곳까지 와 닿았고, 그 순간 남한산성 은 작가 김훈의 영상소설이 아니라 감독 황동혁과 배우들의 온전한 영화가 되었다.

소설이라는 이야기법은 영화라는 이야기법으로 ‘번역’되어야 할까, ‘재창조’되어야 할까. 문학팬이자 영화팬으로서 답은 후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남한산성 은 분명 김훈의 텍스트를 우직하게 옮겨 쓴 번역의 결과물로 연출되었지만, 대본을 받아 든 연기자들은 그것을 훌륭한 창작물로 되 뱉어냈다. 텍스트로 써지지 않은 것과 써졌되 옮겨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을 정확히 전달해 낸 이들의 성취를 그저 ‘김훈의 문장 덕’이라 말할 수 있을까?

김훈이라는 찬란한 텍스트를 끝까지 끌어안고 가면서, 삶의 사사로운 무게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그 텍스트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정확히 반대의 언어로 정확히 같은 것을 가리키는 그 이상한 말싸움의 스펙터클을 말과 글의 후광 대신 시선과 호흡의 실력으로 증명해 낸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만들어 낸 영화의 몇 장면 앞에서, 잠시나마 문학이 무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