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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Article on Tae-An, Korea

Travel+Leisure Korea

November 2008

Yummy Route 1
Yummy Route 2
Yummy Route 3

“우리, 먹으러 가는 겁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나는 포토그래퍼에게 이번 여행의 주제를 간결하고 박력 있는 이 한마디로 설명했다. 터프가이가 된 것 같았다. 포토그래퍼는 아이처럼 좋아했고 전화기 너머로 후르릅,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던 것도 같다.

 

가을엔 대하와 전어 정도는 먹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남도 맛기행을 계획하느라 고민하던 어느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였다. “11월이면 대하와 전어도 끝물이야.” 내 좌뇌는 이렇게 속삭였지만 “대신 새조개와 굴 시즌이 시작되지.” 하고 우뇌가 답했다. 어쨌든 11월은 꽃게와 전어와 대하와 굴과 새조개를 모두 맛볼 수 있는 때니, 나는 일단 서해로 가고 싶었다.

삼길포에 먹으러 가는 겁니다

암만 생각해도 우리나라 가을 하늘이 최고로 멋지다는 생각이 들던 날 나는 서해안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목적지는 충청남도 당진, 서산, 태안, 홍성 일대다. 서해대교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송악나들목에서 아산만을 오른쪽에 두고 615번 지방도를 따라갈 예정이었다. 이 도로는 석문 방조제와 일몰이 멋진 왜목마을을 지나 대호방조제를 거쳐 삼길포까지 이어진다. 삼길포로 가는 이유는 여행 계획만큼이나 간단했다.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 이곳에는 매일 새벽에 바다로 나갔던 고깃배들이 선착장에 들어와 싱싱한 횟감을 파는 선상 횟집촌이 있고 요즘 그곳엔 꽃게와 우럭과 노래미가 널렸다고 했다.
삼길포에 도착한 건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다. 바다를 향해 길게 튀어나온 부두 양쪽으로 고깃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쪽에 예닐곱 척씩 나란히 정박한 배들은 각기 오늘 아침에 가져온 고기를 선창에 가득 싣고 있을 터였다. 영진호, 영창호, 만성호. 가족 중 누군가의 이름이거나 ‘성공’ ‘번영’ 등의 뜻을 담고 있을 이름이 뱃전에 높이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아침조회 시간에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 가슴팍의 명찰 같아서 “어이, 영진이!” “거기, 영창아!” 하고 부르면 배가 벌떡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횟감이나 꽃게를 사러 온 사람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배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학생주임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메뉴와 가격을 꼼꼼히 체크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음씨 좋은 노老선생님의 미소를 머금고 사진 찍기에 열중하는 이도 있었다. 가격은 거의 비슷해서 우럭이 킬로그램당 1만2천~1만3천 원, 노래미가 1만5천 원 정도였고 꽃게는 1만2천 원이었다. 회를 주문하면 선창에서 바로 잡아 올려 회를 쳐주고, 이걸 주변에 있는 식당으로 가져가 5천 원만 내면 반찬과 매운탕을 차려준다. 초고추장과 간단한 야채만 파는 곳도 옆에 있어서 간단하게 회만 먹고 싶은 이는 근처에 있는 천막 그늘에 자리를 잡아도 좋다. 아예 따뜻한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부둣가에 앉아 소주잔을 돌리는 아저씨들도 보였다.

색色이 넘쳐나는 가을의 서해 바다

내가 어느 배로 갈지 결정을 못하고 있는 사이 포토그래퍼는 영진호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한테 ‘꽂혀’ 있었다. “컬러 정말 죽이지 않냐?”라며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날 찍어 무얼 하게?”라면서도 요구하는 포즈를 다 취해주고 있었다. 붉은 머릿수건–노란색 티셔츠–하늘색 바지–주황색 장갑과 새빨간 고무장화로 이어지는 색의 대비는 푸른 가을 하늘과 서해 바다를 배경으로 눈이 부셨다. 그 남다른 형광빛 복장에 이끌려 나는 영진호에 올라 “어머님, 우리 두 명 먹을 건데 우럭 얼마나 사면 되나요?” 하고 물었다. “두 명이면 2만 원어치는 먹어야 혀. 내가 많이 줄게.”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네~ 싸게, 많이 주세요(히히히).” 거기선 이런 말이 어찌 그리도 쉽게 나오던지. 아주머니는 웃으며 매운탕까지 공짜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이구, 기자님이 아니고 대학생들 가텨서 내가 많이 주는 겨.” 깎아주고 많이 주겠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황홀해서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햇빛이 부딪히는 소리가 쨍 하고 날 것만 같은 은빛 회칼이 우럭 세 마리를 소리 없이 토막 냈고, 하늘색 페인트칠을 한 갑판 위에 놓인 흰 도마와 검은 우럭의 등과 새하얀 뱃살은 다시 시원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노래미도 많이 먹는데 이제 겨울로 접어들면 우럭만 맛볼 수 있을 거라 한다. 그때 영진호 옆으로 보성호가 툴툴거리며 들어왔다. 배 위에는 꽃게가 가득 담긴 커다란 그물 바구니가 네 개나 있었다. 얼핏 봐도 묵직해 보이는 꽃게들은 주로 5킬로그램 단위로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고 있는데 한 서울 아가씨가 “알 꽉 차 있어요?”라고 또각또각 하이힐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 아가씨, 지금 알을 찾음 어째. 꽃게 알은 봄에 차지!” 술기운에 얼굴이 벌건 아저씨의 면박이 돌아왔다. 사실은 나도 조금 전에 “여기 전어는 없어요?” 하고 물었다가 창피를 당했던 터였다. 아주머니는 전어나 대하는 여기서 찾으면 안 된다며, 남당항으로 가보라 했다.

고소한 대하 향기를 따라

삼길포에서 우럭을 배 터지게 먹고 길을 나서 29번 국도와 7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서산까지 갔다. 여기서 시간이 남으면 634번 지방도를 따라 태안반도 북서쪽에 있는 신두리까지 갈 수도 있고 649번 지방도를 따라 부석사를 지나 간월도까지 갈 수도 있다. 간월도에서 다시 96번 지방도와 18번 군도를 이용하면 횡성군 남서쪽의 천수만에 면한 남당항에 닿는다. 호기롭게 ‘먹으러 갑니다’라고 했던 만큼 나는 간월도에서 굴밥을 먹어야 했고 남당항에선 전어와 대하와 새조개도 먹어야 했다. 하루에 이 모두를 먹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에겐 힘이 부치므로, 이상적인 코스는 낮에 태안 일대를 둘러보고 저녁으로 굴밥을 먹은 후 다음 날 점심을 남당항에서 먹는 것이다. 꼭 태안반도를 모두 둘러보지 않더라도(삼길포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안면도까지 반나절에 둘러보는 것은 다소 무리다) 가을에 이 일대에는 눈길을 끄는 장소가 구석구석에 많다. 삼길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대산읍을 지나다가 서쪽으로 빠지면 썰물 때 바닷길이 열리는 웅도가 나오는데, 이 작고 조용한 섬도 꼭 한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갯벌 위로 다리처럼 놓인 길을 따라 섬 안으로 들어가면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 숲 속으로, 아기자기한 어촌 골목으로, 황금빛 논과 푸른 언덕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그리고 섬 서쪽 끝에서는 다시 주변의 이름 모를 섬을 향해 바닷길이 열려 있다. 사진 찍고 편안하게 앉아 쉬고 싶은 곳 천지인 이 섬에 차로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때는 간조 시각 전후 두 시간 정도다.
11월이면 간월도에 있는 굴밥집들이 본격적으로 생굴 요리를 내놓는다. 굴밥은 사시사철 즐길 수 있지만 굴물회나 굴무침은 10월 말부터 여름 전까지만 맛볼 수 있다. 이 시기엔 남당항에서도 ‘새 얼굴’이 등장하는데, 바로 겨울철 명물 새조개다. 새 부리처럼 생긴 조개를 팔팔 끓는 육수에 담갔다가 먹는 새조개 샤브샤브는 가을철 전어와 대하가 차지했던 자리를 11월부터 대신하기 시작한다. 삼길포에 선상 횟집촌이 있다면 남당항에는 파라솔 타운이 있다. 파라솔이 옹기종기 모여 부둣가 횟집을 이루고 있어 이렇게 불렸는데, 지금은 다 고쳐 지어 파라솔만 찾다가는 낭패를 본다. 횟집에 앉자마자 “혹시 새조개 들어왔나요?”라고 물었지만 아쉽게도 아직이란다. 대신 대하구이를 먹기로 하고 소금이 달구어지기를 기다렸다. 펄떡펄떡 뛰는 대하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 안됐지만 한편으로는 군침이 돌았다. 이윽고 흰 소금 위에서 새우가 노을처럼 붉게 타올랐고, 나는 그것을 뱃속에 차곡차곡 넣은 채 진짜 불타는 노을을 보기 위해 왜목마을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