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없습니다.
혼도 없을지 모릅니다(…)
항상 늙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인 두려움이었다. ‘난 그렇게 늙지는 않을 거야’ 라는, 그야말로 ‘근자감’일 뿐일 확신을 싸구려 모텔에 아무렇게나 깔린 빨간 카펫처럼 밟고 선 채로 말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여주는 여자]에 차례로 등장한 그런 ‘말년들’의 모습을 내게 대입해 보는 상상은 해 보지 않고 있다. 아니, 못 하고 있다. 그저 머릿속에 그려볼 수조차 없을만큼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모습이란 믿음만 꽉 붙잡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말 그럴까?
성소수자와 장애인과 코피노와 몸 파는 이들의 이야기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게서 꽤나 먼 얘기다. 감독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절박하되 모질지 않고 가난하되 비루하지 않게 그렸다. 덕분에 얼핏 보면 내 얘기가 아니지만 달리 보면 꼭 아닐 이유도 없는 그런 삶들이 우리 앞에 섰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말년이 이들처럼 꼭 절박하거나 가난하진 않더라도 이들 이상으로 얼마든지 외로울 수는 있지 않을까, 하고 물어도 보게 된다. 재깍재깍 무시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나는 정말로 안 외로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확신을 가진 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나 외로운 날이 왔을 때, 어쩌면 우리 존재의 가치는 그 때 내 손에 남아있을 한 줌의 여유로 규정될 것이다.
그 한 줌의 여유란 당연히 돈은 아니다. 그 와중에 주위의 힘든 이를 돌아보는 여유. 그 와중에 내 곁의 아픈 이에게 어깨 한 번, 이불 귀퉁이 한 번 빌려주는 여유. 그 와중에 내 벗들의 안부를 묻고 소영처럼 직접 보내드리진 못하더라도 함께 젊음을 찬양하거나 시간을 원망하고 때론 ‘잘 가시게’ 하며 기억해 주는 여유. 인간적인,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바로 그 여유를 마지막 자존심처럼 꼭 쥐고 있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두려운 죽음을 그토록 갈구하게 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처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할머니 몸을 하고도 “할머니, 할머니 하지 마!”라 일갈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말에 어쩌면 위엄조차 깃들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고 [죽여주는 여자]의 소감을 말하는 것은 역시 또 혼이 없는 아아아 중독됐어 소감일 것이다. 연기에 관한 수식어가 따로 더 필요 없을 윤여정은 글로는 그 다름의 정도를 구분하기 힘들 회한, 참담함, 황망함 같은 감정을 얼굴에 LED라도 달린 양 선명하게 전달하고, 윤계상과 그 외 조연들 역시 남루하지만 그 남루함이 스스로의 죄가 되어선 안 되는 캐릭터들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다소 억지스럽고, 꽤나 비약이 심하고, 그래서 자칫 난파할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끝까지 잡아준 것은 오롯이 이 배우들의 공일 것이다. 물론, 끝까지 혼을 잃지 않은 감독의 주제의식도.